분노하지 않는 어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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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3(목) 17:34
칼럼
분노하지 않는 어저귀
최창일 시인·이미지 평론가·<시화무> 저자
  • 입력 : 2023. 02.07(화) 16:44
분노(憤怒)는 받아 들리 수 없는 내적 갈등들이다. 비분강개(悲憤慷慨)를 몸에 두르고 사는 작가에게는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윌리엄 센스톤은 “분노는 매우 큰 힘이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면 세상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최창일 시인은 윌리엄 말처럼 ‘분노’의 시편이 주목된다.
‘멈추지 않는 말들은 뜨거운 입김을 내뱉는다/깃발도 소리치고 한 번쯤 죽어봐도 좋을 캄캄한/소리 들이 울고 지나간다/진실은 사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성난 말들은 고삐를 놓고 목의 힘줄을 올린다//진리를 갉아먹은 배신의 그들에게 무엇을 기댈 것인가/ 부술 수만 있다면 그날의 시간을 몽땅 새집으로 짓고 싶다//’ <광장을 지나면서> 전문이다.
누구에게나 젊음이 있고 고뇌와 방황의 끝이 있다. 고뇌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다시 분노의 시간이 된다.
‘하나 둘 셋/……/밤은/ 많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의 <못 자는 밤> 전문이다. 단형(單形)의 시다. 윤동주 시인이 못 자는 밤에서 말하려는 것은 긴 장문의 분노가 있을법하다. 동주 시인은 단형의 시를 만드는 것은 분노는 길면 분노가 아니라는 결론일 수 있다. 인생에 분노가 긴 사람에게는 언제나 밤이 길다. 새벽은 더디고 어둠은 칠칠하다. 성애낀 유리 창마냥 자욱히 흐린 분노의 자의식이 얼비친다. 무엇인가 가슴에 묵직하게 눌린 가슴과 그 답답함, 억울한 세상, 억울한 젊음, 소리 내지 못하는 울음과 분노 등이 바닥에 깔리고 있다.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고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라도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시인은 그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무슨 일에나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욕심에 끌리는 시를 만든다면 소망에 붙잡힌다면 어떻게 자기의 청정을 말할 수 있을까.
최창일과 윤동주 시인의 부분적인 시에서도 감정의 주체를 감당하는 모습이다.
자신을 향한 분노의 소리를 종소리처럼 울리게 한다. 누가 묻지도 않는데 남에게 자기의 계율과 도덕을 선전하는 사람, 스스로 자기 일에 떠들고 다니는 사람, 거룩한 진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못난 것은 정치인과 사진을 찍고 그것을 자신의 SNS에 자랑하듯 말하는 자들이라고 생전의 황금찬 시인은 지적하곤 했다.
자신이 속한 소중한 소통 방에 자신의 글이나 견해가 아닌 미상의 글들로 현혹, 미혹하는 시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윤동주 시인의 분노 조절에 감상을 의뢰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때 묻은 교법을 미리 만들고 고치며, 치우쳐서 자기 안에서만 훌륭한 열매를 보는 사람은 흔들리는 평안의 사람들이다. 사물에 고집을 알고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시인들은 비좁은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기를 꾸준하게 노력한다.
분노는 그 어디에도 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다. 식물에도 분노는 있다. 다만 인간과 다르게 식물은 사악(邪惡)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우리 곁에 흔한 잡초, 어저귀(학명, Abutilon theophrasti Medici us) 식물은 미국에서 한때나마 농작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어저귀 식물에서 섬유질을 얻어내 의류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였다. 배의 항로에 필수인 밧줄을 만들기도 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의류에 관심이 많았던 워싱턴은 영국의 양모를 배척하며 어저귀에서 뽑아낸 섬유질을 군비(軍備)처럼 귀하게 여겼다. 중국과 인도에서는 어저귀의 씨앗을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면서 어저귀보다 더 좋은 섬유질을 가진, 마 종류의 식물을 개발하며 어저귀는 잡초로 전락하게 이른다.
그 시기는 그리 멀지도 않다. 불과 19세기의 일이디. 어저귀의 처지에서 보면 그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는 농작물로 귀히 여기다 잡초의 명단에 올리고 만 것이다. 어저귀는 노란 꽃망울을 피우면서 분노의 기색은 없다. 모든 일에 기대고 의지하려 들면 비난을 받는다. 기대고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나 식물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비난은 편견이다. 편견에서 오는 분노는 쓸어버리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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