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이 담긴 남도의 밥상...미각 살리는 음식의 향연

상다리가 휘는
기 살리는 음식
맛 살리는 여행!

편집팀 tdh1234@naver.com
2014년 12월 18일(목) 18:07
수라간 상궁이 전해준 솜씨
강진 한정식


동에 순천, 서에 강진’이라는 말이 있다. 토지가 비옥한 강진이 순천과 함께 전라도에서 가장 부유한 고을이었다는 뜻. 그만큼 강진은 부자들이 많았다. 조선 후기, 수라간 상궁 한 명이 강진 목리(木里)로 귀양을 오게 되었는데,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목리의 아녀자들에게 수라간 상궁의 귀양은 궁궐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목리 아녀자들은 귀양살이하는 상궁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살뜰하게 구는 목리 아녀자들을 위해 상궁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궁중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 그러나 그도 시간이 지나면서 밑천이 다 드러났고, 그 뒤부터는 수라간의 요리법을 하나씩 가르쳐주었는데, 이때 수라간에서 임금께 올리던 궁중음식이 전해져 ‘강진 한정식’이 태어났다고 한다.
강진한정식은 그 바탕을 궁중음식에 두고 있지만 처음에는 지금처럼 반찬이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찬의 가짓수도 제한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임금과 왕비만이 12첩 반상을 받을 수 있었으며, 왕족이나 제아무리 벼슬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9첩 이상은 금지되었다. 반찬을 늘릴 수 없으니 대신 음식의 모양이 점점 화려해졌다. 여기에 청자골이라 불리던 도자기의 고장답게 아름다운 식기까지 가세해, 먹기 아까울 정도로 보기 좋은 음식과 식기들이 밥상을 수놓는 강진한정식이 완성되었다. 최근 반찬의 가짓수까지 늘린 강진한정식은 고급스러운 궁중요리의 명맥을 이어가는 강진의 자랑이 되었다.

원혼을 달래주고 얻어낸 맛
고흥 붕장어구이

사철 내내 바닷장어를 잡으며 살아가는 고흥 도화면 발포리 마을 옆의 야트막한 동영산 봉우리에는 낡은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발포리에는 매년 흉년이 계속되었고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 사람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노인의 꿈속에 발포의 만호(수군의 종4품 벼슬)를 지내던 황정록의 가족들이 나타나더니 ‘동영산 상봉에 제당을 짓고 동제를 지내줄 것’을 간청했다. 황정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다 그만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 비보를 전해들은 그의 부인 송 씨는 왜놈들에게 능욕을 당할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며 마을 동쪽의 우암 절벽에서 아이 셋과 함께 바다로 몸을 던졌는데, 이들이 노인의 꿈에 나타났던 것이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그 부탁대로 동영산 봉우리에 비석을 세우고 동제를 지냈더니, 그 뒤부터 마을을 휩쓸던 질병이 씻은 듯 사라지고 고기가 많이 잡혀 지금까지 풍요롭게 살아왔다고 한다.
송 씨가 뛰어내렸다는 우암 절벽 앞 활개바위 근처에서는 유독 갯장어와 붕장어가 많이 잡히는데, 이곳 사람들은 활개바위의 모양이 여성의 생식기를 닮았고, 송 씨의 정절을 간직한 곳이어서 장어가 많이 모이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곳의 바닷장어는 맛이 좋은데, 그 중에도 양념을 골고루 발라서 숯불에 구워 먹는 붕장어 양념구이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고흥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전해진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음식
구례 사찰정식

지리산의 주능선인 노고단이 있는 구례에는 화엄사, 천은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이 많다. 특히 화엄사는 창건한 지 1,500년을 훌쩍 넘어가는데, 이렇듯 먼 옛날부터 사찰 가까이에서 살아오다 보니 구례사람들에게는 절에서 비롯된 여러 문화들이 일상생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보통의 산채정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례의 사찰정식도 그 속에는 절 음식이 추구하는 ‘세 가지 맛’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첫째, 구례의 사찰정식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간단한 방법으로 조리한다(음식의 맛). 둘째, 상차림이 정갈하고 아름다우며(기쁨의 맛), 셋째, 육류와 오신채(五辛菜)는 올리지 않는다(수행의 맛). 오신채란 마늘, 파, 달래, 부추, 무릇 등 다섯 가지 자극적인 맛을 내는 채소로, 불가에서는 이것들을 먹으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물론 수행하는 스님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상대로 내올 때는 마늘과 파 정도는 적당히 들어간다.
사찰정식의 상차림을 보면 역시 산나물이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상에 오르는 산나물만도 스무 가지는 족히 되는데, 지리산이 800여 종의 각종 산야초가 자생하는 지역이니 당연한 일이다. 또한 밥 하나도 그냥 짓지 않고 흑미, 찹쌀, 조, 수수, 밤, 대추 등을 함께 넣어 안친다. 불가에서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연’을 이용한 것도 특징인데, 밥에는 연잎가루가 섞여 있으며 연꽃으로 살짝 덮어 향을 보탰다. 이렇게 수행을 하듯 정성들여 내오는 밥상을 마주하면 마음이 한결 정결해지고 차분해진다.



왁자지껄한 장터에서 팔던 쇠고기 국밥
나주 곰탕


나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장이 선 고장으로 유명하다.
조선 세종 때, 지금은 5일장이라 부르는 장시가 나주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산포를 통해 호남의 각종 집산물들이 나주 장터로 몰려들었고, 물건들과 함께 사람들도 늘 북적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에는 값싸고 양 많은 서민적인 음식이 인기를 끌기 마련. 하지만 나주 장터에서는 순대국이나 해장국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곰탕을 많이 팔았다. 주변에 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벼농사의 중심지다 보니 곰탕의 재료인 소가 흔했고, 근처에 관아가 있어 여유 있는 고을 아치들이 곰탕을 즐겨 찾았기 때문이다.
사골을 우려낸 것이 곰국이고, 여기에 밥을 말아 내오면 곰탕이 된다. 살림살이 어려운 시기에도 고기나 소의 내장 등을 듬뿍 담아 내주는 장터 인심은 나주곰탕의 인기로 이어졌고, 이는 나주장을 찾은 장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나주곰탕은 전라도의 곰탕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어 지금은 꼭 나주가 아니더라도 그 ‘브랜드’를 내걸고 장사하는 식당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음식은 ‘원조집’에서 먹어야 제 맛이라 했던가? 지금도 그 옛날의 맛을 이어오고 있는 곰탕의 맛 때문에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주를 찾는다. 나주곰탕은 오로지 사골과 고기로만 맛을 내는데, 핵심은 ‘맑은 국물’이다. 사골을 푹 고아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양지, 사태, 목살 등을 넣고 다시 끓이면 국물이 점차 맑아지면서 맛이 한결 깊어진다.


대나무의 영양을 고스란히 담아낸
담양 대통밥 정식

예로부터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한 담양. 대통밥 역시 먼 옛날부터 담양에서 전해 내려왔을 법하지만, 사실은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 초, 하동군 청학동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청학동에서는 우리 전통 음식문화의 원칙 중 하나인 ‘약식동원(藥食同原:음식이 곧 약이다)’을 지켜오고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갖가지 식재료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청학동에서 식재료를 연구하던 사람이 대나무를 뜨겁게 달구면 그 안에서 죽력(대나무기름)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우리 몸에 아주 이로운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를 약으로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대나무가 흔하다 보니 ‘중풍, 실어증, 소갈증 등에 좋다’는 죽력의 효능을 믿지 않았고, 또한 대나무기름이라는 것 자체를 먹기 꺼려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먹일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다가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 그릇처럼 만들어 그 안에 밥을 지어보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밥을 잘 먹는 것이었다. 대나무 밥그릇에 담긴 밥은 보기에도 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밥이 생겨나자 쾌재를 부른 것은 담양에서 음식점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고려 초부터 매년 음력 5월 13일을 ‘죽취일(竹醉日)’로 정해 마을 사람 모두가 마을 주변과 야산에 대나무를 심어 가꾸었을 정도로 담양은 대나무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하지만 대나무를 이용한 음식은 죽순과 죽엽주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던 차에 ‘대나무 통에 밥을 지어 먹는다’는 소식은 담양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차츰 담양의 음식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통밥을 내놓기 시작했다. 요즘 담양에서는 죽순과 댓잎을 이용한 요리들을 모아 만들어낸 ‘대통밥 정식’이 인기를 끄는데, 대나무의 상쾌하고 그윽한 맛을 대통 안에 정성스럽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풍년을 비는 마음이 담긴 맛
무안 짚불구이 삼겹살


무안군 몽탄면 사람들은 추수가 끝나면 으레 강가에 둘러 앉아 볏짚을 태웠다. 그 불에다 강에서 잡은 숭어를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 갔단다. 이렇듯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볏짚에 음식을 구워 함께 먹는것은 어느새 몽탄면의 전통이 되었다. 사실 이모든 일은 숭어가 사람들을 강변으로 불러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갯벌에 살다가 날이 쌀쌀해지면 몸집이 커져 영산강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오는 숭어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몽탄숭어,명산장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러나 영산강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몽탄면에서 숭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한번 생긴 전통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농사가 끝나면 여전히 강변에 모였던 몽탄사람들은 어느 때부턴가 숭어 대신 삼겹살을 볏짚에 구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몽탄의 전통에서 지금의 ‘짚불구이 삼겹살’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농사가 끝나도 사람들이 강변에 모이는 일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무안사람들은 매캐하면서도 알싸한 볏짚 타는 연기 속에 익어가는 짚불구이 삼겹살을 즐겨 먹는다. 짚불은 마법을 부린 것처럼 삼겹살의 맛을 확 바꿔놓는다. 섭씨 1,000도에 가까운 짚불로 1분 남짓 익히면 삼겹살 속의 육즙은 그대로 남고, 겉에는 은은한 볏짚 향이 배어들기 때문이다. 요즘 쓰는 볏짚은 유기농 재배 농가의 것을 2년간 바짝 말려 사용해 그을음이 나지 않고, 농약 걱정도 없다. 짚불구이 삼겹살은 이 고장 특산품인 ‘양파 김치’와 ‘뻘게장(뻘게를 현미, 찹쌀, 보리 등과 함께 갈아 만든 쌈장)’을 함께 올려 ‘삼합’으로 먹는 것이 제 맛이다. 고소한 삼겹살, 매콤한 양파김치, 그리고 담백한 뻘게장이 함께 어우러진 쌈을 싸서 먹으면 입안은 그야말로 맛의 풍년이다.


잔치 손님의 '염치'가 발견한 맛
신안 홍어삼합

신안군 흑산도 하면 홍어요, 홍어 하면 삭힌 맛이다. 하지만 원래 흑산도에서는 홍어를 싱싱한 회로 먹었단다. 산지니까 항상 싱싱한 홍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삭힌 홍어는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배에 실어 영산강을 따라 나주, 목포 등에 내다 파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예전 한 홍어장수가 미처 팔지 못하고 남은 홍어가 혹 썩은 것이 아닌 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소금에 절이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물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 한번 맛을 보았더니 오히려 살점은 더욱 차지고 톡 쏘는 삭힌 맛이 오묘했더란다. 그 뒤 삭힌 홍어의 맛은 전라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흑산도에서도 점차 홍어를 삭혀 먹게 되었다고.
삭힌 홍어와 돼지고기를 김치에 얹어 함께 먹는 것을 ‘삼합’이라고 하고, 여기에 탁주를 곁들이면 ‘홍탁삼합’이 되는데, 이 ‘삼합’이란 것이 태어난 데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전라도의 잔치에선 홍어가 최고 인기 메뉴였지만 그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잔치 손님들은 귀한 홍어만 집어먹으면 염치없어 보일까봐, 눈치 봐가며 돼지고기와 김치도 함께 집어먹기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이 셋의 궁합이 절묘해 어느새 ‘삼합’이란 메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외국산 홍어를 수입하는 요즘은 잔칫날이 아니더라도 쉽게 삼합을 먹을 수 있지만 흑산도 홍어는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홍어 역시 싱싱한 놈을 삭혀야 제 맛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천장을 델 듯 확 퍼지는 ‘오묘한 냄새’를 풍기며 차지게 씹히는 홍어회의 참맛은 산지인 흑산도에서 먹어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수십가지 찬이 한 상 가득
영광 굴비정식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라는 야심 많은 인물이 있었다.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 권력을 잡았는데, 왕이 죽자 다른 딸을 왕이 된 외손자에게 시집보내 괴상한 족보를 만들어냈을 정도다. 그의 야심은 점점 커져서 결국 왕의 자리까지 넘보았고, 임금을 독살하려다 실패해 정주(靜州:지금의 영광) 법성포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소금에 절여 해풍에 말린 조기 맛을 보고 감탄한 이자겸은 조기를 정성껏 담아 임금에게 보내면서 ‘정주굴비(靜州屈非)’라고 적었다고 한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보내는 것일 뿐, ‘뜻은 굽히지 않았다(屈非)’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때부터 영광의 말린 조기는 굴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유명한 이유가 이자겸 때문만은 아니다. 조기는 제주 남서쪽에서 겨울을 나고 산란을 하기 위해 서해로 이동하는데 법성포 앞 칠산 바다를 지날 때 살이 가장 통통하고 알도 꽉 들어찬다고 한다. 또한 가까운 법성포에서 염장을 하기 때문에 신선하며 촉촉한 바닷바람이 굴비에 맛을 보탠다.
법성포에는 일찍부터 굴비백반집들이 들어섰는데,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찾아오는 외지인이 크게 늘었다. 장사가 잘 되니까 굴비 만들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음식점을 열었고, 서로 경쟁하다 보니 반찬이 점점 늘어나 어느새 ‘백반’은 ‘정식’으로 탈바꿈했다. 수십 가지 찬이 한 상 가득 차려지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굴비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굴비의 살을 발라내면 자르르 흐르는 ‘윤기’부터가 다르다.



갈비와 낙지의 환상궁합
영암 갈낙탕


지금은 영암의 명물이 된 갈낙탕은 영암군 독천리에서 탄생했다. 갈비와 낙지, 언뜻 봐서는 도저히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요리가 탄생한 데에는 독천리의 독특한 환경이 한 몫을 했다.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있지만 예전에는 독천리 앞바다에 미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무안, 신안 일대의 갯벌에서는 예전부터 맛 좋은 일명 ‘뻘낙지’가 잡혔고, 미암 갯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거무튀튀하지만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뻘낙지는 영암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결국 독천리에는 수십 곳의 낙지 전문점들이 모인 ‘낙지의 거리’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독천리 낙짓집들은 특이하게도 낙지와 갈비탕을 함께 팔았다고 한다. 지명에 ‘송아지 독(犢)’ 자가 들어간 것에도 알 수 있듯, 독천리는 예전부터 좋은 소를 많이 키우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처럼 외식문화가 발달해 낙짓집 따로 갈비탕집 따로 있을 형편도 아니었으니 한 식당에서 모두를 팔았던 것이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에 소 값이 폭락하자 한 음식점에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소갈비와 낙지를 함께 넣고 끓여보았단다. 그랬더니 갈빗살도 낙지도 육질이 한결 부드러워져, 음식점 주인은 따로 팔던 두 가지 음식을 합쳐 ‘갈낙탕’이란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고. 그 뒤로 갈낙탕은 영양가가 높은 보양식이라는 이미지로 인기를 얻으며 낙지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갈낙탕의 국물은 갈비탕에 가까운데 함께 들어간 낙지가 기름진 고기 국물을 개운하고 깔끔하게 만든다. 여기에 파를 큼직하게 숭덩숭덩 썰어 넣어 낙지와 갈비의 잡냄새를 없앴는데, 이는 체내의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학식있는 선비들의 영양식
장성 꿩 샤부샤부


홍길동 생가 터가 있는 황룡면 아곡리의 옛 이름은 ‘아치실’이다. 지금은 50여 세대, 7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 ‘아치실’이란 이름은 호남 땅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단다. 마을 남자들 대부분이 학식 있는 선비였고, ‘아치실에서 시집온 규수는 시댁을 일으켜 세운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인근 고을의 명문가 치고 이 마을 집안과 인연을 맺지 않은 집이 없었다고.
이렇게 학식 쌓은 공부만 할 줄 알았던 아치실 선비들이 즐기는 풍류가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꿩 사냥이었다. 아치실이라는 이름에 ‘꿩 치(雉)’ 자가 들어갈 만큼 이 마을에는 꿩이 많았다. 또한 아치실에서 잡은 꿩고기는 옛날부터 그 맛이 좋기로 유명해,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물에도 포함될 정도였다고 한다. 가끔씩 산으로 나가 꿩을 잡는 일은 글만 읽던 선비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었고, 선비들은 잡아온 꿩을 요리해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꿩고기로 소를 넣은 꿩만두는 야식으로 그만이었다.
지금은 이름에서 ‘꿩 치’자가 빠진 아곡리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이곳에선 그 옛날 아치실 꿩요리의 전통이 남아 있다. 그 중에도 꿩만두, 꿩고기완자, 꿩전골, 꿩 샤부샤부 등이 차례로 나오는 정식이 유명한데, 특히 꿩 샤부샤부는 꿩 뼈로 우려낸 육수에 꿩고기의 겉만 살짝 익혀 먹는 것으로 부드러운 맛 덕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그 맛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 요즘도 홍길동 생가 터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꿩요리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제철에 싱싱하게 맛보는 바다의 진미
매생이국

매생이는 김, 파래 등과 같은 해조류로 바다에서 이끼처럼 자라는데, 서식 조건이 까다롭다. 아주 깨끗한 바다에서만, 그것도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잔잔한 만에서 잘 자란다. 또 온도가 따뜻한 남해에서 살지만, 무슨 심보(?)인지 추운 겨울에 쑥쑥 큰다고. 전라도에서도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은 강진만과 장흥만 단 두 곳뿐인데, 이 중 강진은 강진만과 탐진강이 만나는 목에 위치해 다른 식재료가 많았던 터라, 자연스럽게 매생이는 장흥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몸에 좋은 음식이지만 바다에서 건져내면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엽록소가 빠져 노랗게 변해 다른 지역에 내다팔 수가 없어, 매생이는 오로지 장흥사람들만 즐기는 별미가 되었다. 또한 물을 조금 넣고 끓이다가 국간장과 다진 마늘로 간을 하고 참기름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될 정도로 조리법이 간단해서 장흥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자산어보』에 ‘매생이는 가늘기가 누에실과 같고 소털처럼 촘촘하며 맛은 향긋하고 달콤하다’고 나와 있다. 이처럼 머리카락 한 올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랗기 때문에 같은 양의 미역과 비교했을 때 표면적이 훨씬 넓어 영양가가 더 높다고 한다.
요즘에는 서울 등 전국 어디에서도 사시사철 매생이국을 맛볼 수 있다. 매생이를 급속 냉동시켜 보관하는 냉동기술이 개발됐기 때문. 각종 미디어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매생이국의 맛과 풍부한 영양을 소개했고, 매생이는 날이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도 제철에 바로 건져 올려 먹어야 맛볼 수 있는 매생이국의 진미를 느끼려면 지금도 겨울 장흥으로 가는 것이 좋다.



새콤하게 무쳐 먹는 홍어 사촌

진도 간재미회무침

진도는 섬이지만 주업이 농업이다. 바닷바람이 따뜻하고 맑은 날이 많아 예로부터 곡식농사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도의 식생활 역시 육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도 사람들의 밥상에는 자주 ‘간재미’가 올라온다는 것.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간재미는 『자산어보』에서 소개한 ‘간잠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간재미는 한 마디로 ‘홍어 사촌’이라 할 수 있는데, 크기는 홍어보다 작지만 맛은 그와 비슷해 진도에서는 홍어 버금가는 대접을 받고 있다. 사전에는 ‘간재미’가 ‘간자미’의 방언이며, ‘간자미는 가오리의 새끼’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진도사람은 지금도 간자미와 간재미는 엄연하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간재미는 다 자라도 어른 손바닥 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진도사람들도 처음에는 가오리의 새끼로 착각하고 잡아도 다시 놔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철에 잡은 간재미는 육질이 단단하면서 홍어와 매우 비슷한 냄새를 풍겼고, 회를 쳐서 먹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홍어와 매우 비슷한 맛이 났다. 이후 귀한 홍어와 비슷한 맛을 내면서 구하기 쉬운 간재미에 진도사람들은 열광했다. 코가 모가 난 간재미는 옛날부터 진도 것을 최고로 쳐주었다. 청정하고 먹이가 풍족한 진도의 서촌 갯벌에서 잡아 올린 간재미는 바다에서 잡는 간자미보다 맛과 영양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두께가 얇아서 홍어만큼 차진 회가 나오지 않고, 삭히면 그냥 말라버리기 때문에 간재미는 주로 회무침으로 먹는다. 포를 뜬 간재미 살을 막걸리로 치대서 연하게 만들고, 여기에 미나리와 무를 채 썰어 넣고 양념을 해서 식초로 새콤달콤하게 버무린다. 이렇게 부드러워진 살점이 물렁뼈와 함께 꼬들꼬들하게 씹히는 맛은 홍어회가 부럽지 않다. 간재미회에 밥을 비벼 먹어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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