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배신자

문민용 논설위원

2026년 09월 30일(수) 16:22
조선조 숙종이 평복으로 민정 시찰을 나갔다가 저잣거리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선비를 만났습니다. 딱하게 여긴 숙종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선비는 “과거시험 보러 왔다가 낙방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숙종은 “참으로 안됐다”라며 “아무 벼슬이라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비는 “뉘시는지 모르겠으나 시켜주면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숙종은 군수, 판서, 정승 벼슬을 차례로 나열하며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물을 때마다 그 선비는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숙종은 마지막으로 “임금 자리 주면 하겠소”라고 물었습니다. 순간 숙종 눈에 불이 번쩍했습니다. 선비는 “나보고 역적질하란 말이냐?”며 숙종의 뺨을 때린 것입니다. 놀란 숙종의 무감들이 선비를 붙잡고 요절을 내려는 찰나, 숙종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 충신이다.” 그 후 벼슬길이 열린 선비는 정승 반열까지 올랐습니다.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세상에는 꾀를 내세우며 똑똑한 체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당나라가 망국의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왕조의 지배 질서가 형편없이 붕괴되고 있을 때입니다.
중국 천하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고 간 농민 반란으로 황소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때 황소의 부장으로 주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자기를 키워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절도사라는 직임을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황소를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크게 기려 각가지 특혜를 베푸는 가운데 그에게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습니다.
“그대 당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도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 있었습니다.
본래 은인이요 주인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충신으로 변한 주전충이다. 그때부터 당나라의 병권과 함께 정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다시 한번 배신하여 290년을 이어오던 당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후량국의 태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의 연속선상에서 황제가 된 주전충는 온갖 호사와 포악을 자행하더니 미처 5년이 다 가기 전에 자기 아들 주우규의 칼을 맞고 그의 최후를 장식했습니다. 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배신을 뿌리고 배신을 가꾸던 사람이 마침내 엄청난 배신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1년이 채 못 되어 자기 동생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형을 죽이고 천하를 차지한 주우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형의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후당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존욱이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목숨과 함께 황제의 면류관 그리고 나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전충이 세운 후량국은 겨우 14년을 지탱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실로 숨 가쁜 배신과 배신의 세월이요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상고하다 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로 한없이 계속되는 배신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후에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진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젊어서 그는 고향 하남성 난고현에서 작은 정육점을 경영한 적이 있습니다. 만인이 능멸하는 백정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대 동리 사람들은 묘하고 예쁘장한 것이 있으면 으레 진평이 썰어 놓은 고깃점 같다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찮은 백정 노릇을 할 때도 진평은 남다른 정성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내게 일국의 정사를 맡긴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고깃점같이 반듯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마침내 정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기사는 the 대한일보 홈페이지(http://www.daehanilbo.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tdh123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