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 이규혁(37·서울시청)이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아름다운 도전에 나선다.
한국인 최초로 6회 연속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게 된 그는 한국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이자 산 증인이다. 1978년생 말띠인 그는 ‘청마의 해’에 열리는 이번 올림픽에서 선수생활의 대미를 화려하게 마무리할 작정이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은 지난해 12월 소치동계올림픽에 나설 종목별 스피드스케이팅 출전 명단을 발표했다. 한국이 총 15장의 티켓을 거머쥔 가운데 이규혁은 남자 500m와 1000m 등 두 종목의 출전권을 확보했다.
이규혁은 올시즌 ISU 월드컵 1~4차 대회까지 500m 랭킹 43위·1000m 랭킹 37위로 6회 연속 동계올림픽 출전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 선수 가운데 동·하계올림픽을 통틀어 6차례 올림픽을 경험하게 된 선수는 이규혁이 유일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드문 경우다.
캐나다 승마 선수인 이안 밀러(67)가 2012런던올림픽에서 동·하계올림픽 통틀어 역대 최다인 10회 올림픽 출전 기록을 세웠다. 동계올림픽에서는 일본의 스키 점프 선수 가사이 노리아키(40)가 7회 연속 출전 기록을 보유 중이다.
이규혁에게 ‘올림픽’은 영광과 환희와는 거리가 먼 아쉬움과 상처의 연속이었다. 1991년 13살의 나이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이규혁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가슴 떨리는 첫 올림픽을 경험했다.
비록 출전한 500m 36위와 1000m 32위의 초라한 성적표를 거머쥐었지만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단거리 선수로 성장을 거듭했다. 20년 넘게 전 세계의 빙판을 누비는 동안 각종 국제대회를 접수하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위상을 높였다.
이규혁은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4차례,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차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도 통산 14차례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1997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ISU 월드컵의 남자 1000m에서 세계신기록(1분10초42)을 작성한 데 이어 2001년 캐나다 오벌피날레국제남자대회 1500m에서 1분45초20으로 또 한 번 세계기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모든 선수들의 꿈인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1000m에서 거둔 4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1분09초37로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네덜란드의 에르벤 벤네마르스(3위·1분09초32)에게 0.05초 뒤져 메달을 놓쳤다.
4년 전 밴쿠버동계올림픽 때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500m 15위, 1000m 9위에 그쳤다. 1000m 레이스를 마친 그는 얼음판에 드러누웠고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심한 공허함에 우울증까지 더해지면서 이규혁은 20년 스케이트 인생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출전한 2011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이규혁은 종합우승을 차지, 꺼져 가던 올림픽 도전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에 이르렀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이규혁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500m에는 후배 모태범(25·대한항공)이 버티고 있고, 1000m에는 절대 강자 샤니 데이비스(32·미국)가 자리한다.
그는 올 시즌 월드컵에서 디비전A(1부리그)를 단 한 차례 경험했을 뿐이다. 1차 대회 1000m 디비전A에서 출전 선수 20명 가운데 18위에 머물렀다.
앞선 다섯 번의 올림픽까지 오로지 메달만을 겨냥했던 그는 욕심을 내려놨다.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그는 마지막 올림픽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지난 20년 간 이어온 아름다운 도전을 끝내고 빙판과의 뜨거운 이별을 준비하는 그를 향해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